'여분의 삶'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6.05.22 잡생각
  2. 2006.05.04 여분의 삶
  3. 2006.03.27 [소설] 공중곡예사

잡생각

그냥잡담/그럭저럭일상 2006. 5. 22. 22:31 posted by 파란수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은 있었지만 나에겐 다른 걱정이 있었다.

'깁스를 한 채 어떻게 비속을 지나간담?'

금요일 어이없이 다리를 삐었기에 내 오른쪽 다리에는 붕대가 칭칭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침을 맞기 위해 한의원으로 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스펀지로 어설프게 만든 깁스용 슬리퍼에 물이 질질 샐 것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일단 학교 교문까지만 가면 택시를 탈 수 있다는 생각에 우산을 폈다.

'아, 나 돈이 없지.'

지갑에는 딱 한의원에 낼 치료비용+2000원 정도가 있었다.
그냥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느림보 거북이처럼 천천히 걸었다. 절뚝절뚝.
오랜만에 학교에서 일찍 나왔으니 도서관에 들러 책이나 반납하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느림보 거북이처럼. 절뚝절뚝.
책 반납을 하고 나니 기왕 온 거 책도 몇개 빌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책꽂이 사이를 기웃거리나 3권을 골랐다.
과연 기한 내에 읽을 수 있을지. 대출을 하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도서관에서 정문까지는 너무 멀었다. 왼발에 힘을 주면서, 느림보 거북이처럼, 절뚝쩔뚝.
때마침 엠피쓰리도 꺼져서 내 걸음에 맞춰 느릿하게 지나가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우산을 통해 내 손으로 느껴지는 빗방울의 낙하와 맞춰 들리는 비소리뿐이었다.
정문까지는 딱 절반이었다. 이제부턴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남아있었다.
정문 앞에서 약속이 있는 듯한 시끌시끌한 대학생들을 지나, 높낮이가 불균일하게 덧바른 아스팔트 위 물이 고인 웅덩이를 지나,붕대끝 빼끔히 고개를 내밀은 내 발가락 위에 떨어지는 물기를 느끼면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도중 그새 배가 고파서 햄버거 하나를 사먹고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탔다.
빈자리에 털석.

'왜 이렇게 난 느릴까'

깁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또 한의원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왼발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문을 닫았을까 걱정하면서 한의원에 들어갔다.
나가려고 했는데 딱 맞춰 왔다는 한의원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침을 맞았다.
침을 꽂은 채 적외선 찜질을 받는 동안 빌린 책 한권을 뽑아들었다.

롯시니는 오페라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비단 사다리'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세빌리아의 이발사' '도둑까치' '세미라미데' '윌리엄 텔' 등 우리들에게 낯익은 오페라들을 만들고 76살에 죽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최후의 오페라인 '윌리엄 텔'을 쓴 것이 37살로, 그 이후는 일체 오페라를 쓰지 않고 매우 적은 수의 종교적인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 불리지만 생애의 보다 많은 세월은 오페라와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보낸 셈이다.

이 부분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생애의 보다 많은 세월은 오페라와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보낸 셈이다.라는 말.
공중곡예사를 읽은 후 나를 괴롭히는 개념.
또 다시 여분의 삶이다.

한동안 그 문장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느릿느릿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시간이 되어 침을 뽑고 한의원을 나왔다.
뻐근하던 발목이 조금은 괜찮아진 듯 했지만 내 머리속은 공중곡예사를 읽었던 직후의 직후처럼 다시 '여분의 삶'으로 꽉 차버렸다.
어느 삶이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또한 여분의 삶을 살았구나.
다시 느릿느릿 집을 향해 걸었다.

여분의 삶

그냥잡담/그럭저럭일상 2006. 5. 4. 23:27 posted by 파란수
분의 삶 :
생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화려했던 시간이 나머지 고요한 삶보다 아주 짧거나, 그 화려한 삶이 너무나 폭발적일때, 그에 반하는 고요한 삶을 이르는 말.
















 

공중곡예사를 읽은 후로 자꾸 '여분의 삶'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소설] 공중곡예사

그냥잡담/그럭저럭일상 2006. 3. 27. 21:26 posted by 파란수
이 책의 내용을 한문장으로 축약하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1924년 11월 초부터 1974년까지, 믿을 수 없는 어떤 인물 - 세인트 루이스의 어느 유흥가를 헤메던 가장 작고, 가장 영악하고, 가장 더러운 아홉살바기 부랑아 월트 - 의 삶에 대한 기록.

나는 생을 살아갈 때 한 순간의 선택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갈림길에서 길은 나누어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속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언젠가 한 점에서 만난다고 믿고있다.
마치 싸구려 잡지 책에서 흔히 등장하는 심리테스트 - yes or no 화살표를 따라가는 - 에서 헷갈리는 질문에 나올 때 약간씩 답을 바꾸어도 결국 C타입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다만 달라지는 것은 과정, 얼마나 풍부하게 사느냐 아니면 얼마나 건조하게 사느냐 라고 생각한다.

더러운 길바닥에서 배운 것이라곤 눈치 밖에 없는 잔머리꾼이자 인간의 조건을 미립자 한두개 차이로 간신히 만족하는 건방진 꼬마 월트는 9살에 예후디 사부를 따라감으로써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중력의 법칙에 묶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바로 하늘을 나는 것이다. 이 책은 하늘을 난다는 너무도 특별하고 허무맹랑한 행위에 대해 그 방법이나 과정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마치 누구나 겪었을 법한 소년시절의 한 페이지를 보듯 편안히 읽을 수 있다.

처음엔 더러운 부엌에서 분노와 절망에 찬 눈물을 흘리며 몇센티 정도로 간신히 떴고 물위와 하늘에서 걷는 방법을 터득, 얼뜨기들의 테러를 받는  촌스럽고 어설픈 첫공연 후엔 차츰차츰 명성을 쌓아가 나중엔 스토리있는 공연을 하는 공중곡예사, 예술가 원더보이 월트로서 하늘에서 청중을 압도하는 연기를 펼치게 된다.
그리고 14살에 되던 해 다시 땅에 붙잡혀 사는 인생이 되었고 그 후의 인생은 예후디 사부를 만나지 않았어도 갔을 법한 인생, 길바닥의 더러운 헝겊인형, 날 때부터 부랑자의 속성을 지닌듯한 거리의 소년이 걸었을만한 인생 행로를 가기 시작한다.

월트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구구절절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책 속에서 내내 월트의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반복이며 그 자신 밖의 배경인 시대상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정신없이 지나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듯.
물론 그가 예후디 사부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원더보이 월트로서의 삶은 절대 없었을 테지만 9살에 했던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뒤바꾸었다기 보다는 너무나 특별한 '인생의 장' 하나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5년 밖에 되지 않지만 책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순간들. 차갑고 냉정한 마법사 같은 예후디 사부와 따뜻한 형이었던 곱사등이 흑인 천재 이솝과 어머니 역할을 해주었던 인디언 수아주머니와 지적이고 아름답지만 한편 팜므파탈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던 위더스푼 부인과 함께 했던.

그 이후는 마치 여분의 삶처럼 축약되어 있지만 월트가 진정한 평안을 찾은 것은 그 축약된 여분의 삶에서이다. 그리고 월트는  마치 그 모든 일은 소년시절의 추억에만 묻어두려는 듯이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이후 45년동안 단 한번도 나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고 나중엔 날 수 없게된 일을 절실하게 아쉬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늘을 날아야 할 필요성을 못느꼈다고 하겠다.
그 대신 마치 자신의 어린시절을 보는 것 같이 말썽쟁이 작은 악마 노릇을 하는 유세프를 보면서 생각한다.
그 때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에 대해, 그 자신이 생명의 붉은 불꽃으로 가득 찬 얼마나 겁없고 당돌한 소년이었는지에 대해.
그리고는 너무나 큰 열정과 감정으로 가득차 올라 자신을 증발시킬 줄 안다면, 어떤 아이나 하늘로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