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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없는 이야기

좋아하는 이야기1

파란수 2022. 2. 21. 03:07

1947년 대법원 판결(1947. 9. 2. 선고 민상 제88호)을 좋아한다.

한 기혼 여성이 가옥인도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는데, 상대방인 피고쪽에서 이 여성이 남편의 허가없이 소송을 하였는데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원심에 문제가 있다며 대법원에 상고한 사건이 있었다. 1947년은 해방 후였으나 대한민국의 헌법도,민법도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본 민법을 의용해서 판결을 내렸었는데, 당시 일본 민법에서는 기혼여성은 남편의 허가가 있어야 소송할 수 있고 남편의 허가를 받지 못할 상황일 경우엔 시부모의 허가를 받아야 소송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말도 안되는 조항을 그대로 우리나라의 의용민법 14조 1항에서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법원 민사부 법관이었던 김용무, 김찬영, 양대경, 노진설, 김윤근 등 5인은 해당 조항에 대하여 ‘주로 부(남편)에 대하여 우월적 지배권을 부여한 취지라고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며 ‘아방(우리나라)은 일본의 기반으로 해방되었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기초삼아 국가를 건설할 것이고 법률,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제도를 민주주의 이념으로써 건설할 것은 현하의 국시라 할 것’이라 하면서 ‘만인은 모름지기 평등할 것’이고 ‘여성에 대하여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고 기타 관공리에 임명되는 자격도 남성과 구별이 무하여 남자와 동등한 공권을 향유함에 이른 바인즉 여성의 사권에 대하여도 또한 동연’하다면서 ‘남녀평등을 부인하던 구제도로서 그 차별을 가장 현저히 한 민법 제 14조는 우리사회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그 적용에 있어서 적당한 변경을 가할 것은 자연의 사세’라고 판시하여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 판례는 우리나라 판례 중 남녀평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판례이고, 여성의 참정권을 1948년에 제정한 국회의원선거법으로 명문화 하기 전에(헌법보다 국회의원선거법이 먼저 제정되었다)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공권인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존재함을 최초로 적시한 판례이다. 지금 시선으로는 자명해 보이는 판결이지만 당시 최고의 법률전문가들은 이 판결을 비판했다. 자국법률도 없고 헌법도 없는 나라에서 대법원이 헌법재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아직 성문화되지 않은 헌법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념인 민주주의만으로 헌법재판이 가능한가, 이 법률이 여성에 대한 제한인가 처에 대한 제한인가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가 등등이 논쟁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이 판결을 떠올리면 조선 반도라는 공간적 한계와 1940년대라는 시간적 한계,그리고 식민지 백성이라는 정신적 한계를 다 뚫고 나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요즘 말로 하자면 찢었다?